아이비리그와 SAT
미국 아이비리그(동부 명문 8개 대학)에 속한 다트머스대가 5일 2025학년도(2029년 졸업 예정) 입학 지원생부터는 대학 입학을 위한 표준 시험인 SAT나 ACT 성적을 반드시 제출해야 한다고, 5일 발표했다.
이에 앞서 MIT대도 2022년 3월말, 2023 학년도 지원 신입생이나 전학생들부터 SAT(Scholastic Aptitude Test)나 ACT(American College Testing) 성적 제출을 요구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또 조지타운대도 2023~2024 학년도 신입생부터 SAT나 ACT 성적표를 내도록 결정했다. 이들 시험은 미국 대학에 지원하는 학생이 치르는 표준 시험으로, 해당 학생이 그 대학의 학문적 요구 사항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그동안 미국의 많은 대학 사이에선 신입생 선발 시 SAT 성적을 요구하지 않는 추세가 계속 확산됐다. 유명 기숙학교에서 교육 받고, 고액 SAT 학원 강의를 듣는 부유층 학생들의 SAT 성적이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 성적보다 높은 경향이 뚜렷해, 형평성에서 어긋난다는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때마침 코로나 팬데믹까지 미국을 휩쓸면서, 학생들이 이런 대학 수학(修學)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을 치르기도 쉽지 않았다. 이 탓에, 많은 대학은 시험 성적이 특별히 좋다고 판단하는 학생이 지원 시 제출할 수는 있지만, 미제출 시에도 입학 전형 때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또 미국의 진보세력(progressives)은 이런 표준 시험이 부유층 자녀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대학의 인종ㆍ계급 간 다양성을 해치고 불평등을 심화한다며, 표준화시험 무용론(無用論)을 극렬히 주장해왔다.
미 대학들을 이 진보세력이 지배하면서, 표준 시험은 정치적 의제와도 맞물려 비판 대상이 됐다. 버클리와 LA 등 아홉 군데 캠퍼스에 학부생 23만여 명이 등록한 캘리포니아 대학교 시스템은 아예 2020년, 지원학생이 원한다 할지라도 이런 표준 시험 성적표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대입 표준 시험 성적을 요구하는 대학들은 리버럴한 미국 대학 분위기에서 다소 동떨어진 곳으로 간주됐다. 예를 들면, 미 육사(웨스트 포인트)나 플로리다ㆍ조지아ㆍ테네시 주와 같이 보수적인 지역의 최고 주립대학들은 여전히 ACT나 SAT 성적을 요구한다.
그런데, 다트머스대가 SAT/ACT 성적을 입학 지원 시 필수 제출 요건으로 못 박은 것이다. 다트머스대의 이 결정은 작년 여름 시안 바일럭(Sian Beilock) 전(前) 바너드 여대 총장이 이 대학 총장에 부임하고 내린 것이었다.
◇대입 표준시험 성적이 학생의 학업 능력 예측에 훨씬 도움 돼
5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바일럭 총장은 다트머스에 온 뒤에, 4명의 경제학ㆍ사회학 교수들에게 대입 표준 시험 성적과 학업 수행능력과의 관계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 결과, 고교 성적보다는 표준 시험 성적이 한 학생이 다트머스대에서 학업을 잘 마칠 수 있는지를 예측하는 데 훨씬 유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고교들은 학점 인플레이션이 심해, 명문대에 지원 학생 대부분이 ‘스트레이트 A’ 성적표를 제출하기 때문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다트머스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학생 중 적잖은 수가 자신의 SAT/ACT 성적이 낮다고 생각해 아예 성적표를 제출하지 않았는데, 사후 조사해 보니 오히려 제출했으면 합격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미국 대학은 낙방한 학생이 표준화 시험 결과를 제출하지 않았어도, 입학 사정이 다 끝난 뒤에는 시험 결과를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한다.
다트머스대 교수 4명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또 SAT 1600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1400점 대를 받은 빈곤층 학생 수백 명이 자신의 점수가 낮다고 판단해 시험 결과를 제출하지 않았다. 결국 대학 측은 이 중 일부 학생의 경우 수학 능력을 확신할 수 없어 뽑지 않았다. 미 최고 엘리트 대학 입학 지원생들은 상당수가 1500점 이상을 받는다.
그러나 리 코핀 다트머스대 입학처장은 NYT에 “표준 시험 성적을 제출했었더라면, 일부 학생은 합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런 조사 결과에 기초해, 다트머스대는 대입 표준 시험 성적표 제출을 다시 요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시험 성적이 낮은 빈곤층 학생은 해당 집단에서 상대 평가하면 된다
물론, 빈곤층 자녀들의 시험 성적이 부유층 자녀에 비해 떨어진다는 현실은 남는다. 다트머스대는 빈곤층 지역ㆍ가정 출신의 학생이 지원했을 때에는 해당 학생이 속한 고교의 전반적인 표준화 시험 성적을 살펴서, 이 학생의 시험 성적이 그 집단에서 얼마나 우수한지를 따지겠다고 밝혔다.
바일럭 총장은 “사회는 불평등한 것이고, 우리는 각자의 환경에서 뛰어난 학생들을 찾는다”고 NYT에 말했다. 이렇게 되면, SAT 성적이 1400점에 훨씬 못 미쳐도 경우에 따라선 다트머스 입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일럭 총장은 또 다트머스대만 대입 표준시험 점수를 요구했다가, 지원학생이 줄어들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NYT에 말했다. 시험 성적 제출이 ‘선택 사항’이었을 때에도 지원생 수에는 큰 변화가 없었고, 1200명의 신입생을 뽑는데 매년 3만 명이 넘는 학생이 지원하는 현실에선 달라질 것이 없다는 얘기였다.
◇진보세력은 “표준 시험은 부유층 자녀에게 유리” 무용론 주장
그는 SAT/ACT 성적 요구가 소수집단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금한 미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어긋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 표준 시험 성적은 개별 학생의 가정ㆍ교육 환경을 포함한 합격 결정의 여러 요인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들이 다양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채택했던 대입 표준시험 기피 현상은 잘못된 판단에 따른 ‘실수’였다는 연구 조사는 계속 나온다.
MIT대 입학처장인 스튜어트 쉬밀은 고교 성적표가 인플레이션 되다 보니 “스트레이트 A 성적만으로는 이 학생이 MIT에서 잘 적응할 지 판단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같은 아이비 리그인 브라운대의 크리스티나 팩슨 총장은 작년 6월 브라운대 동창회보에 “표준 시험 결과가 고교 성적표보다 훨씬 나은 학문적 성공의 예측 척도”라고 썼다.
작년 7월 아이비리그 8개 대학과 듀크ㆍMITㆍ스탠퍼드ㆍ시카고대로 구성된 이른바 ‘아이비 플러스(+)’ 대학 신입생 조사에서도 고교 성적과 대학의 학업적 성공 사이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표준 시험 결과와 학업 성공과는 높은 상관 관계가 있었다. 심지어 표준 시험 제출을 불허한 캘리포니아대의 두 교수가 조사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조사는 더 나아가, 표준 시험 점수가 여러 입학 사정 요인의 하나로 작용한다면 오히려 높은 학업 수행 능력을 지닌 학생들로 구성된 대학의 다양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런데도, 왜 많은 미국 대학이 여전히 표준 시험 결과를 요구하지 않거나, ‘선택적’ 제출 사항으로 놔둘까.
NYT는 지난 1월 또 다른 기사에서 “이들 시험이 많은 학생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정치적 진보세력이 표준 시험을 증오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예를 들어, 흑인ㆍ히스패닉계 학생의 표준화 시험 평균 점수는 백인ㆍ아시아계ㆍ부유층 학생에 비해 매우 낮다.
그러나 NYT는 어느 엘리트 대학도 이 표준 시험 성적만으로 학생을 뽑지는 않으며, 시험 성적은 다양한 인구 집단에서 자격 있는 학생을 선발하는 여러 기준 중의 하나라서 오히려 다양성을 높인다고 밝혔다.
또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미국 사회에서, ‘표준 시험은 쓸모 없고 반(反)생산적’이라는 개념은 진보 진영의 신조(信條)가 됐다. 심지어 캘리포니아대 연구진은 미국 대학이 ‘수학 능력’이 뛰어난 학생을 뽑지 말고, 모든 계층의 학생에게 고루 대학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NYT는 “정치적 양극화로 인해, 미국인들이 얼마나 경험적 증거에 기초하지 않은 입장을 채택하는지 보여주는 한 예”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여러 조사 결과는 표준 시험 성적보다 다른 입학 고려사항들, 예를 들어 스포츠ㆍ음악 활동과 같은 것이 오히려 부유층 자녀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신입생 집단의 인종ㆍ경제적 쏠림 현상을 촉진한다는 것이었다.
부유층 학생들은 고액의 수험 준비 강의를 듣고 비싼 응시료를 내고 여러 번 SAT 시험을 치를 수 있어서, SAT 성적이 더 좋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ㆍ계급간 ‘불평등’은 초등학교~고교까지 치르는 여러 표준화 시험 결과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MIT 입학처장 “가난한 학생들에게, SAT는 오히려 명문대 진학의 생명줄”
아이비+플러스 신입생 연구를 진행했던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인 라지 체티는 “SAT 성적은 미국 사회 불평등의 ‘증상’이자, ‘원인’이 아니다”고 말했다. 즉 인종ㆍ경제적 계급 간 SAT 성적의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해서, SAT 자체가 편향돼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2년 동안 대입 표준 시험 성적을 고려하지 않았던 MIT의 쉬밀 입학처장은 NYT에 “표준화 시험 성적 제출을 의무화하면서, MIT는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신입생 구성원을 뽑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MIT의 1학년생은 38%가 백인이고, 40%가 아시아계, 15%는 흑인, 16%는 히스패닉계라고 한다.
아이비 플러스 신입생을 상대로 공동 조사를 한 하버드대 경제학자 데이비드 데밍은 “표준 시험 성적이 없으면, 집안에서 처음 아이비 리그를 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무명(無名) 고교 출신은 학교 성적이 좋더라도 (대학 수학 능력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어) 입학 사정 시 가장 피해를 본다. 그들에게 SAT는 생명줄”이라고 말했다.
https://m.news.nate.com/view/20240206n22769?mid=m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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